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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왕 이야기

13세기 고려 고종과 몽골 침입 | 개경 함락 위기에서 팔만대장경까지. 고려 고종과 몽골 침입의 모든 것

by 오늘도 좋은하루 2026. 9. 15.

13세기 고려 고종의 시대는 고려 역사에서 가장 오랜 전쟁을 겪었던 시기였습니다. 몽골의 침입은 1231년 시작되어 1259년까지 거의 30년 동안 이어졌고 고려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채 긴 항전을 이어갔습니다.

 

13세기 고려 고종과 몽골 침입 ❘ 개경 함락 위기에서 팔만대장경까지. 고려 고종과 몽골 침입의 모든 것
13세기 고려 고종과 몽골 침입 ❘ 개경 함락 위기에서 팔만대장경까지. 고려 고종과 몽골 침입의 모든 것

 

몽골과 고려의 충돌 그리고 1231년 침입

고려 고종은 1213년부터 왕위에 있던 강종의 아들로 1213년이 아니라 1192년에 태어났으며 1213년부터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1213년 강종이 세상을 떠난 뒤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후 고종은 1259년까지 무려 46년 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고종의 재위 기간이 길었던 만큼 고려의 정치와 사회에서 많은 사건이 일어났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사건은 단연 몽골과의 전쟁이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도 고종을 무인 정권 아래에서 재위하면서 1231년부터 몽골의 침입을 겪고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한 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종이 왕위에 올랐을 당시 고려는 이미 무신정권이 정치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1170년 무신정변 이후 문신 중심의 정치 질서는 무너졌고 최충헌과 최우로 이어지는 최씨 무신정권이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고종 역시 왕이라는 지위에 있었지만 실제 정치 운영에서는 최씨 정권의 영향력이 매우 컸습니다.

 

고종의 재위 초반부터 고려 북방의 상황은 평온하지 않았습니다. 1218년에는 거란의 잔여 세력을 추격하던 몽골군이 고려에 들어왔습니다. 고려는 몽골과 연합해 거란 세력을 물리쳤고 이후 몽골과 물자를 주고받는 관계가 만들어졌습니다. 처음부터 고려와 몽골이 적대 관계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초기에는 공동의 적을 상대로 협력하는 관계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몽골이 고려에 요구하는 물자가 점점 많아지면서 양국 사이에는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1225년에 발생했습니다. 몽골 사신 저고여가 고려에서 돌아가던 중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고려는 이 사건이 자신들과 관계없는 일이라고 주장했지만 몽골은 고려에 책임을 물었습니다. 결국 양국의 관계는 급격하게 악화되었고 몽골은 고려를 침입할 명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후 1231년에 몽골의 대규모 군대가 고려를 공격하면서 오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1231년 8월 몽골군은 살리타이를 지휘관으로 삼아 고려를 공격했습니다. 몽골군은 빠른 기동력을 앞세워 고려의 북쪽 지역을 빠르게 돌파했습니다. 의주를 비롯한 여러 지역이 공격을 받았고 고려군은 몽골군의 기병 중심 전술에 제대로 대응하기 어려웠습니다. 특히 몽골군은 단순히 국경 지역의 성만 공격한 것이 아니라 빠르게 남쪽으로 진격했습니다. 고려군도 곳곳에서 저항했습니다. 1231년 9월에는 황주 동선역에서 고려군과 몽골군이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때 고려군은 몽골군의 기습을 받아 어려움을 겪었지만 지역의 초적 농민군이 적극적으로 싸우면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10월 안북성 전투에서는 고려군이 몽골 기병의 공격에 크게 패하면서 상황이 다시 불리해졌습니다. 몽골군은 개경을 지나 충주까지 진출했고 고려 조정은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습니다. 결국 고려 조정은 몽골과의 화친을 추진했습니다. 1231년 12월 고려 왕실의 회안공이 살리타이에게 찾아가 화친 의사를 전달했고 양국 사이에 일단 화의가 이루어졌습니다. 몽골군은 다루가치라는 관리들을 고려에 남겨두고 1232년 1월 철수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전쟁은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고려가 몽골의 압력을 받아들이는 상황이었습니다.

 

몽골은 고려에 많은 물자와 공물을 요구했고 내정에까지 간섭하려 했습니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이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특히 당시 최씨 정권은 몽골과의 화친만으로는 고려의 독립적인 정치 질서를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최우는 몽골군이 철수한 직후부터 새로운 대응 방법을 준비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강화도 천도였습니다. 1232년 고려 조정은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겼습니다. 강화도는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었기 때문에 대륙에서 활동하던 몽골 기병이 쉽게 공격하기 어려웠습니다. 고려는 몽골의 강력한 기병 전력을 육지에서 정면으로 상대하는 대신 섬으로 들어가 장기적으로 버티는 전략을 선택했습니다. 우리역사넷에서도 강화천도를 몽골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한 해도입보책의 하나로 설명하면서 동시에 최씨 정권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강화도 천도는 고려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선택이었습니다.

 

개경을 버리고 섬으로 들어가는 것은 단순한 수도 이전이 아니었습니다. 고려가 몽골에 완전히 굴복하지 않고 장기간 항전하겠다는 뜻을 보여주는 결정이었습니다. 물론 강화도에 들어갔다고 해서 고려 전체가 안전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몽골군은 육지 곳곳을 공격했고 수많은 백성과 농촌이 전쟁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고종은 이후 오랫동안 강화도에서 왕으로 지냈습니다. 왕이 수도를 떠나 섬에서 지내는 상황은 고려 왕실에도 상당한 부담이었습니다. 그러나 강화도는 몽골의 직접적인 공격을 피하면서 고려의 중앙 정부가 계속 유지될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고려는 강화도를 중심으로 국가 운영을 이어가면서 몽골에 대한 항전을 계속했습니다. 1231년의 첫 번째 침입은 고려가 몽골이라는 새로운 강대국의 군사력을 직접 경험한 사건이었습니다.

 

고려는 정면으로 맞서기 어려운 상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에 맞춰 전쟁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성곽과 산성 그리고 섬을 이용한 방어가 중요해졌으며 각 지역의 백성들도 직접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몽골과 고려의 충돌은 단기간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1232년 이후 몽골군은 다시 고려를 공격했고 고려는 강화도 정부를 유지하면서 육지 곳곳에서 저항했습니다. 고종의 시대는 이제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고 고려 사회 전체가 장기전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강화도 천도와 이어진 장기 항전

1232년 강화도 천도 이후 고려와 몽골의 전쟁은 더욱 길어졌습니다. 몽골군은 고려가 강화도로 들어간 것을 굴복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고려 역시 몽골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섬을 중심으로 항전하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이때부터 고려의 전쟁은 중앙 정부가 강화도에서 버티는 동안 육지의 여러 지역에서 백성과 지방 세력이 몽골군과 싸우는 형태로 이어졌습니다. 강화도는 고려 정부에게 중요한 피난처였습니다. 몽골군의 가장 큰 장점은 강력한 기병과 넓은 육지를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반면 강화도는 바다를 건너야 했기 때문에 몽골군이 평소와 같은 방식으로 공격하기 어려웠습니다. 고려는 이 약점을 이용했습니다. 몽골군이 강화도에 대한 공격을 쉽게 감행하지 못하는 동안 고려 조정은 섬에서 행정과 군사 지휘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강화도에서 버틴다고 해서 전쟁의 피해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몽골군은 육지 곳곳을 공격했고 많은 마을과 농경지가 파괴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산성이나 섬으로 피신해야 했고 식량과 생활 기반을 잃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고려가 국가 차원에서는 항전을 이어갔지만 실제 전쟁의 부담은 지방의 백성과 농민들에게 크게 돌아갔습니다. 이 시기에 고려에서 나타난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지역 주민들의 항쟁이었습니다. 몽골군이 침입하면 주민들은 가까운 산성이나 섬으로 들어가 몸을 피하고 그곳에서 몽골군에 저항했습니다. 중앙군만으로 몽골군의 공격을 모두 막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지역민들의 자발적인 항전이 상당히 중요했습니다. 우리역사넷의 자료에서도 고려가 섬과 산성에 주민들을 입보시키는 방어 전략을 지속적으로 활용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1232년 두 번째 침입에서는 처인성 전투가 유명합니다. 몽골군은 개경을 지나 남쪽으로 내려갔고 광주를 공격한 뒤 처인성을 포위했습니다.

 

당시 처인성은 지금의 경기도 용인 지역에 해당하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지역 주민들과 승려 김윤후가 함께 저항했습니다. 처인성 전투에서 고려군과 주민들은 몽골군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특히 김윤후는 몽골군의 지휘관 살리타이를 사살했습니다. 지휘관을 잃은 몽골군은 더 이상 전투를 계속하지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이 사건은 몽골군의 압도적인 군사력 앞에서도 지역의 주민들이 힘을 합쳐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몽골의 침입은 계속되었습니다. 몽골은 고려가 강화도에 머물면서 항전을 이어가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고려 역시 개경으로 돌아가 몽골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대신 강화도에서 버티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양국의 입장이 계속 충돌하면서 전쟁은 장기화되었습니다. 고종 시대의 몽골 침입은 한 번의 전쟁으로 끝나는 형태가 아니었습니다. 몽골군이 침입했다가 물러가고 다시 침입하는 과정이 반복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고려의 여러 지역이 차례로 공격받았습니다.

 

북쪽 지역뿐 아니라 경기와 충청 그리고 전라도와 경상도까지 전쟁의 영향이 확대되었습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고려 정부는 군사적인 대응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대응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장경 제작이었습니다. 몽골군의 침입으로 1232년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던 초조대장경이 불타자 고려는 새로운 대장경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1236년부터 본격적으로 조성된 재조대장경은 오늘날 흔히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르는 문화유산입니다. 고려 사람들은 불교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고 국가의 평안을 얻기를 기원하면서 대장경을 다시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행위만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몽골의 침입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고려가 자신들의 문화적 전통과 국가적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노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은 전쟁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큽니다. 고려가 몽골군과 싸우는 동안에도 목판을 제작하고 보존하는 작업을 지속했다는 것은 국가의 문화적 기반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전쟁이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는 상황에서도 고려 정부와 불교계는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대장경 제작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피해는 점점 심각해졌습니다. 몽골군의 침입으로 농경지가 황폐해졌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포로가 되었습니다. 국가의 재정도 크게 악화되었습니다. 몽골은 고려에 지속적으로 많은 공물을 요구했고 고려는 전쟁을 치르는 동시에 몽골이 요구하는 물자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1253년에는 몽골 황제와 관리들에게 보내는 물품 때문에 국가 재정이 크게 소모되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고려가 오랫동안 항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습니다. 강화도가 몽골군의 공격을 막아주는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고 산성과 섬을 활용한 방어 전략이 효과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각 지역의 주민들이 몽골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고려의 중앙 정부가 강화도에서 유지되었기 때문에 항전을 지속할 수 있는 정치적 구심점도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강화도에서 버티는 전략에는 한계도 있었습니다. 왕과 집권층이 강화도에 머무는 동안 육지의 백성들은 직접적인 피해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전쟁에 대한 피로감도 커졌습니다. 국가가 장기 항전을 계속하려면 막대한 군사비와 물자가 필요했고 그 부담은 결국 백성들에게 돌아갔습니다. 고종 시대의 몽골 전쟁은 이런 모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국가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항전이 필요했지만 장기 항전은 백성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강화도에 있는 왕실과 육지에서 고통받는 백성 사이에는 현실적인 차이도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고려는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몽골의 침입에 대응했습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고려는 군사적으로도 여러 방어 전략을 발전시켰습니다. 야별초와 별초군 등의 활동도 강화되었고 지역의 산성과 섬을 활용하는 방식도 계속되었습니다. 고종 시대의 항전은 단순히 중앙 정부가 주도한 전쟁만은 아니었습니다. 국가와 군인 그리고 승려와 농민이 각자의 자리에서 몽골군에 맞섰습니다. 처인성에서 김윤후와 주민들이 싸웠던 사례는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고려의 항전이 오랫동안 이어질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지역민들의 저항이었습니다.

 

결국 고려와 몽골의 전쟁은 어느 한쪽이 단기간에 상대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몽골은 고려를 완전히 정복하지 못했고 고려 역시 몽골을 몰아내지 못했습니다. 전쟁은 양국 모두에게 큰 부담이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고려의 국력은 크게 소모되었습니다.

 

1259년 강화와 고종 시대의 끝

고려와 몽골 사이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고려 내부에서도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최씨 무신정권의 약화였습니다. 고종의 재위 기간 동안 고려의 실제 정치는 오랫동안 최씨 집권자들이 주도했습니다. 최우가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최항이 권력을 이어받았고 다시 최의가 정권을 이어갔습니다. 최씨 정권은 몽골에 맞서 장기간 항전을 이어갔지만 전쟁이 길어질수록 정권 내부의 불만도 커졌습니다. 강화도 천도와 장기 항전은 최씨 정권이 권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동시에 백성들의 피해를 계속 키우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몽골의 침입이 반복되고 막대한 물자와 인력이 필요해지면서 최씨 정권의 정치적 정당성도 점점 약해졌습니다. 1249년 최우가 사망하면서 최항이 정권을 이어받았습니다. 이후 최항이 죽은 뒤에는 최의가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최의의 집권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258년 유경과 김준 등이 최의를 제거하면서 약 60여 년에 걸쳐 이어진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졌습니다. 이 사건은 몽골과의 전쟁에서도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최씨 정권이 사라지면서 고려 조정은 몽골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왕권 역시 이전보다 직접적인 정치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습니다. 그동안 최씨 정권이 항전을 주도했다면 이제는 왕실과 새로운 정치 세력이 전쟁을 끝낼 방법을 찾게 되었습니다. 1258년 최의가 제거된 다음 해인 1259년 고려와 몽골 사이에는 강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몽골이 요구한 중요한 조건 가운데 하나는 고려 왕이 몽골의 조정에 직접 찾아오는 친조였고 다른 하나는 강화도에서 나와 개경으로 돌아가는 출륙환도였습니다.

 

하지만 이 두 조건이 동시에 바로 실행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종은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태자가 대신 몽골에 가는 방식으로 친조 문제가 처리되었고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돌아가는 일은 훨씬 뒤인 1270년에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1259년을 고려와 몽골의 관계가 완전히 끝난 해라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1259년은 고려와 몽골 사이의 장기적인 전쟁이 일단락된 해였습니다. 하지만 몽골의 영향력은 이후에도 고려 정치에 크게 작용했고 고려 왕실은 몽골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고종은 1259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재위 기간은 46년으로 고려 역대 왕 가운데서도 매우 긴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종의 생애를 살펴보면 왕이 직접 모든 정치적 결정을 주도한 시기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랜 기간 무신정권이 실제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고 고종은 그 속에서 왕권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고종의 시대를 단순히 무신정권과 몽골이라는 두 세력 사이에 끼어 있던 시기로만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고종 시대 고려는 외부의 거대한 제국과 장기간 전쟁을 치르면서 국가의 생존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1231년 첫 침입 당시에는 개경이 위협받았고 고려는 몽골과 화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한 뒤에는 장기 항전을 선택했습니다. 이 선택이 반드시 모든 면에서 옳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강화도 천도는 고려 정부를 보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지만 육지에 남은 백성들의 피해를 크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몽골군이 전국 곳곳을 공격하는 동안 많은 사람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고 농경지와 마을이 파괴되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문화재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초조대장경이 불타고 다시 대장경을 제작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전쟁의 결과였습니다. 그럼에도 고려가 3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몽골의 침입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강화도라는 지리적 조건만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산성과 섬을 이용한 방어 전략이 있었고 각 지역에서 백성들의 항전이 이어졌습니다. 몽골군이 육지의 여러 지역을 공격할 때마다 주민들은 산성으로 들어가 저항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중앙 정부의 명령과 별개로 지역민들이 적극적으로 싸웠습니다. 특히 처인성에서 김윤후가 살리타이를 사살한 사건은 고려의 항전이 단순히 정규군만의 싸움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분이 높지 않은 지역 주민들과 승려까지 전쟁에 참여하면서 몽골군에 맞섰습니다. 이런 저항이 전국 곳곳에서 반복되면서 몽골은 고려를 빠르게 정복하기 어려웠습니다. 고종 시대의 마지막은 결국 타협이었습니다.

 

고려는 몽골을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했지만 몽골 역시 고려를 단기간에 완전히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오랜 전쟁 끝에 양국은 강화 관계를 맺었고 고려는 새로운 국제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259년의 강화가 곧 고려의 모든 저항이 끝났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1270년 고려 정부가 강화도에서 나와 개경으로 돌아가자 삼별초가 이에 반발하여 항전을 이어갔습니다.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진도로 이동한 뒤 제주도까지 세력을 확대하며 몽골과 고려 정부에 맞섰고 1273년에 진압되었습니다. 따라서 몽골과 고려 사이의 전쟁을 넓은 의미에서 살펴보면 1231년부터 시작된 충돌은 1259년 강화 이후에도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종 시대를 돌아보면 고려가 외부의 거대한 세력과 맞서면서 국가의 생존을 고민했던 시기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231년 몽골의 첫 침입으로 시작된 전쟁은 1232년 강화도 천도로 이어졌고 이후 수많은 침입과 항전이 반복되었습니다. 고려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끝까지 국가 체제를 유지했고 1259년에 이르러서야 전쟁을 일단락시킬 수 있었습니다. 고종의 시대를 기억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사건은 몽골의 침입과 강화도 천도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훨씬 복잡한 고려 사회의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왕권과 무신정권의 관계가 있었고 최씨 정권의 장기 집권이 있었습니다. 몽골의 침략에 맞서 싸운 중앙군과 지방군이 있었으며 산성과 섬으로 피신해 싸운 백성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쟁 속에서도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문화적 전통을 이어가려 했던 고려인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결국 13세기 고려 고종의 시대는 전쟁으로 시작해서 전쟁으로 끝난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고려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강화도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국가를 유지했고 전국 각지의 항전을 통해 몽골의 침입을 견뎠습니다.

 

1259년 강화 이후 고려는 몽골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지만 고려라는 국가 자체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고종 시대의 몽골 침입을 살펴볼 때 단순히 고려가 몽골에게 굴복했다는 결과만 보는 것은 부족합니다. 30년에 가까운 전쟁 속에서 고려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았는지를 함께 살펴봐야 합니다. 강화도 천도와 장기 항전 그리고 지역민들의 저항과 문화적 대응은 모두 고려가 국가의 존립을 지키기 위해 선택했던 방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