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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왕 이야기

11세기 고려 현종과 거란의 침입 | 강감찬이 거란군을 거의 전멸시켰다. 1019년 귀주대첩의 숨겨진 과정

by 오늘도 좋은하루 2026. 9. 13.

11세기 고려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현종입니다. 현종의 재위 기간에는 거란의 대규모 침입이 이어졌고 고려는 국가의 존립을 위협받는 위기를 겪었지만 결국 이를 이겨내며 나라의 기틀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11세기 고려 현종과 거란의 침입 ❘ 강감찬이 거란군을 거의 전멸시켰다. 1019년 귀주대첩의 숨겨진 과정
11세기 고려 현종과 거란의 침입 ❘ 강감찬이 거란군을 거의 전멸시켰다. 1019년 귀주대첩의 숨겨진 과정

 

거란의 침입과 현종의 즉위

고려와 거란의 충돌은 현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갑자기 시작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두 나라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긴장하기 시작한 것은 10세기말부터였습니다. 당시 고려는 북쪽으로 영토를 넓혀 나가면서 압록강 일대까지 세력을 확대하려 했고 거란은 이러한 고려의 움직임을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고려가 중국의 송나라와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거란에게는 상당히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거란은 10세기 초 야율아보기가 여러 부족을 통합하면서 세력을 키웠고 916년 국가를 세웠습니다. 이후 국호를 요로 정하고 동아시아 북방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발해가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한 뒤에는 고려와 거란이 서로 국경을 맞대게 되면서 두 나라의 관계도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고려는 옛 고구려의 영토를 계승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북진 정책을 추진했고 거란은 고려의 북방 진출과 송나라와의 관계를 경계했습니다. 결국 양국 사이에는 군사적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습니다. 첫 번째 대규모 충돌은 993년에 일어났습니다.

 

당시 고려의 왕은 성종이었습니다. 거란의 장수 소손녕이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침입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놓고 의견이 갈렸습니다. 일부에서는 거란에 영토를 내주고 화해하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서희는 직접 거란의 진영으로 가서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습니다. 서희의 담판은 고려와 거란의 관계를 바꾸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점을 내세웠고 고려와 거란 사이에 여진 세력이 자리하고 있어 거란과 교류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을 설명했습니다. 결국 거란은 고려가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거란과 외교 관계를 맺는 것을 조건으로 물러갔고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 지역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고려와 거란 사이의 갈등이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강동 6주는 단순히 땅을 넓혔다는 의미만 있는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압록강을 따라 방어 거점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고려의 북방 방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고려는 이후 이 지역에 성을 쌓고 군사적 기반을 강화했습니다. 거란 입장에서는 고려가 압록강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한 것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의 왕실 내부에서도 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009년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왕위에 올렸습니다. 현종은 왕건의 후손이었지만 즉위 과정부터 상당히 불안정했습니다. 거란은 이 사건을 침입의 명분으로 이용했습니다. 강조가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왕으로 세운 것은 거란이 고려의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구실이 되었습니다. 1010년 거란의 성종은 직접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침입했습니다. 이것이 현종대 거란과의 첫 번째 전쟁이자 고려와 거란 사이에서는 두 번째 대규모 전쟁이었습니다. 당시 거란군은 매우 강력했습니다.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은 초반에 거란군을 막으려고 했지만 결국 패배했고 강조 역시 전사했습니다.

 

거란군은 계속 남쪽으로 내려와 개경을 점령했습니다. 고려의 수도가 적에게 함락되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현종은 수도를 떠나 피란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고려의 왕이 직접 수도를 버리고 피란해야 할 정도였다는 점에서 1010년의 전쟁이 얼마나 위급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란군은 개경을 점령한 뒤에도 고려를 완전히 정복하지는 못했습니다. 고려는 각지에서 저항을 이어갔고 특히 양규와 같은 장수들이 거란군의 퇴로를 공격했습니다. 거란군은 고려의 수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고려 전체를 굴복시키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결국 거란군은 고려에서 철수하기 시작했고 양규 등이 거란군을 공격하면서 상당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1010년 전쟁은 고려에게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개경이 불타고 많은 시설과 민가가 파괴되었으며 왕실 역시 큰 위기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은 동시에 고려가 거란을 상대로 쉽게 무너지지 않는 국가라는 사실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현종은 피란 이후 다시 개경으로 돌아와 무너진 국가를 재건하는 일에 힘을 쏟아야 했습니다.

 

현종에게 1010년은 왕으로서 가장 힘든 시기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즉위 과정에서 정치적 혼란을 겪었고 곧바로 거란의 침입을 받았으며 수도까지 빼앗겼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고려를 다시 일으켜야 했습니다. 현종은 단순히 전쟁을 견디는 데 그치지 않고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군사력을 강화하면서 다음 전쟁에 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1010년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고려와 거란 사이의 갈등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거란은 강동 6주를 다시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양국 사이에는 긴장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긴장이 결국 1018년 세 번째 대규모 침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강감찬과 귀주대첩

1010년 전쟁 이후 고려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했던 문제는 다시 거란이 침입했을 때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였습니다. 현종은 전쟁으로 무너진 국가를 복구하는 동시에 군사적 대비도 강화했습니다. 거란 역시 고려를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양국의 긴장은 계속되었습니다. 거란이 다시 고려를 침입한 직접적인 배경에는 강동 6주 문제가 있었습니다. 1010년 전쟁에서 고려와 거란 사이에 맺어진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자 거란은 고려에 강동 6주를 내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고려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강동 6주는 고려가 압록강 일대에서 거란을 막아낼 수 있는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었기 때문에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1018년 12월 거란은 소배압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다시 고려를 공격했습니다. 이것이 거란의 세 번째 대규모 침입이었습니다. 거란군은 고려의 성을 하나씩 공격하며 시간을 끄는 것보다 빠르게 남쪽으로 내려가 개경을 위협하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고려의 수도를 압박해 왕이 항복하도록 만들고 전쟁을 빠르게 끝내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고려도 이전과 달랐습니다. 현종은 강감찬을 상원수로 임명하고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거란군을 막도록 했습니다. 강감찬은 단순히 거란군과 정면으로 맞붙는 것만으로는 승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거란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지형을 활용하면서 조금씩 전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강감찬이 보여준 전략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흥화진에서의 전투였습니다. 강감찬은 기병을 매복시키고 삼교천의 물길을 이용해 거란군을 공격했습니다. 고려군은 물길을 막아 두었다가 거란군이 강을 건너는 순간 물을 터뜨리는 방식으로 적의 움직임을 무너뜨렸습니다. 여기에 매복하고 있던 병력을 투입해 공격하면서 거란군에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하지만 흥화진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거란군은 계속 남쪽으로 이동했습니다. 고려군은 거란군의 진격을 완전히 막는 것보다 계속해서 피해를 주면서 거란군의 힘을 빼는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거란군은 개경을 향해 내려왔지만 고려군의 저항이 계속되면서 처음 계획대로 전쟁을 빠르게 끝내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습니다. 거란군은 결국 개경 인근까지 접근했지만 개경을 완전히 점령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고려는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군사력을 집중했고 거란군은 장기간 전투를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습니다. 거란군의 가장 큰 문제는 보급이었습니다. 멀리 고려의 중심부까지 들어온 군대가 계속 전투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식량과 군수품을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했습니다. 소배압은 결국 철군을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고려군은 거란군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강감찬은 거란군의 퇴로를 추격하면서 결정적인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전쟁의 승패를 완전히 결정할 수 있는 순간이 바로 귀주에서 만들어졌습니다. 1019년 고려군과 거란군은 귀주에서 크게 맞붙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귀주대첩입니다.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은 거란군을 공격했고 거란군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고려군은 지형과 날씨를 이용하면서 여러 방향에서 거란군을 압박했습니다.

 

결국 거란군의 전열은 무너졌고 대규모 피해를 입은 채 북쪽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귀주대첩은 단순히 한 번의 전투에서 이긴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1010년 개경까지 함락시켰던 거란을 고려가 다시 밀어내면서 고려의 군사적 저력을 보여준 전투였습니다. 특히 거란군이 고려 깊숙이 들어왔다가 퇴각하는 과정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습니다.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에서도 거란군의 피해가 매우 컸으며 살아서 돌아간 병력이 극히 적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귀주대첩 이후 고려와 거란의 관계도 달라졌습니다. 거란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규모로 고려를 정복하려는 전쟁을 이어가기 어려워졌습니다. 고려 역시 전쟁을 통해 북방 방어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현종은 이후에도 국가 재건과 방어 체계 정비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현종의 시대가 남긴 고려의 변화

현종의 재위 기간은 고려 역사에서 전쟁의 시대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현종은 거란의 침입을 막아낸 왕이면서 동시에 전쟁으로 무너진 국가를 다시 세우고 고려의 통치 체계를 정비한 왕이었습니다. 1009년 왕위에 오른 뒤 1010년 거란의 침입을 겪었고 이후 국가를 재건하면서 다시 1018년 거란의 침입을 맞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고려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오히려 중앙 정부와 지방 통치 체계를 더욱 정비할 수 있었습니다. 현종이 왕위에 오른 시점의 고려는 정치적으로 안정된 나라라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목종을 폐위한 강조의 정변으로 왕위가 바뀌었고 거란의 침입까지 이어지면서 왕실의 권위가 크게 흔들렸습니다.

 

1010년에는 개경까지 함락되면서 왕권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현종이 해야 했던 가장 중요한 일은 전쟁에서 살아남는 것뿐만 아니라 무너진 국가를 다시 하나로 묶는 것이었습니다. 현종은 피란 이후 개경으로 돌아와 국가 재건에 힘썼습니다. 전쟁으로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고 행정 체계를 다시 정비했습니다. 또한 지방에 대한 통치력을 강화하면서 중앙 정부의 명령이 전국에 제대로 전달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고려는 이미 성종 때부터 중앙집권적인 국가 체제를 만들기 위한 제도를 마련하고 있었지만 현종 시대의 전쟁은 이러한 국가 체제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거란의 침입을 막는 과정에서도 지방의 성과 군사 거점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강동 6주는 단순한 영토가 아니라 고려의 북방 방어를 담당하는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서희의 외교 담판을 통해 확보한 뒤 고려가 이 지역에 성을 쌓고 방어력을 높였기 때문에 이후 거란군을 막아내는 전초 기지로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1018년의 세 번째 침입에서도 강동 6주 일대의 방어 거점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현종 시대에는 지방 제도 역시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성종 때부터 시작된 지방 통치 제도는 현종 때 더욱 체계적으로 정비되었습니다. 특히 1018년에는 지방 행정 체계가 크게 개편되었습니다. 이때 4도호부와 8목을 중심으로 여러 주와 군과 현이 정비되면서 고려의 지방 통치 체계가 보다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지방 제도의 정비는 거란과의 전쟁과도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국가가 넓은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려면 지방에서 세금과 군사력을 확보하고 중앙의 명령을 전달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전쟁이 발생했을 때 지방의 성과 군사 조직이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중앙의 지휘 아래에서 하나의 방어 체계를 구성해야 했습니다. 현종대의 제도 정비는 이러한 국가 운영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현종은 또한 전쟁 이후 고려의 왕실을 안정시키는 데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전쟁을 겪는 동안 왕실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았지만 이후 왕실의 혼인 관계를 확대하면서 왕위 계승 기반을 안정시켰습니다. 현종에게는 국가의 외부적인 안정을 회복하는 것뿐 아니라 내부의 왕실 질서를 다시 세우는 것도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거란과의 전쟁은 고려 사회에 큰 피해를 남겼습니다. 특히 1010년 개경이 함락되면서 궁궐과 관청, 민가 등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전쟁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했고 국가의 재정에도 부담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고려는 전쟁이 끝난 뒤 다시 국가를 복구했고 북방 방어에 대한 투자를 계속했습니다. 이후 고려는 개경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나성을 쌓았고 북방에는 천리장성을 축조했습니다. 천리장성은 압록강 하구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방어 시설로 알려져 있습니다. 거란과의 전쟁을 경험하면서 고려가 국방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현종의 시대를 이야기할 때 강감찬만 기억하기 쉽지만 실제로 귀주대첩의 승리는 현종의 국가 운영과도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강감찬 한 사람의 뛰어난 전략만으로 거란군을 막아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이 군사 지휘관을 임명하고 필요한 병력을 동원했으며 지방의 방어 체계와 성곽이 버텨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승리였습니다. 국가 전체가 전쟁에 대응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귀주대첩이라는 결과도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특히 1018년 세 번째 침입에서 고려가 보여준 모습은 1010년과 확연히 달랐습니다. 1010년에는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이 피란해야 했지만 1018년에는 거란군이 고려 깊숙이 들어왔음에도 수도를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거란군은 계속된 전투와 보급 문제로 지쳐갔고 결국 퇴각하는 과정에서 귀주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습니다. 이 차이는 현종이 1010년의 전쟁을 단순히 견디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전쟁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군사와 행정 체계를 정비하고 국가의 방어력을 키웠습니다. 결국 세 번째 침입에서 고려는 거란군을 상대로 확실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1019년 귀주대첩 이후 고려와 거란 사이에는 큰 규모의 전쟁이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두 나라는 이후 외교 관계를 정비하고 사신을 주고받았습니다.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을 통해 국제 정세 속에서 군사력뿐 아니라 외교 역시 중요하다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현종의 시대는 단순히 거란의 침입을 막아낸 시대라고만 볼 수 없습니다. 993년 성종 때 서희의 외교로 강동 6주를 확보한 뒤 시작된 고려와 거란의 갈등은 1010년 현종대의 두 번째 전쟁으로 확대되었고 1018년 세 번째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1019년 강감찬의 귀주대첩을 통해 고려가 거란의 대규모 침입을 결정적으로 막아내면서 긴 전쟁의 흐름이 바뀌었습니다. 현종은 고려가 가장 어려운 시기를 지나던 때 왕위에 올랐습니다. 왕위에 오른 직후 정변과 거란의 침입을 겪었고 수도를 빼앗기는 굴욕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고려를 다시 일으켜 세웠고 국가의 행정 체계와 지방 통치 체계를 정비했습니다. 그리고 1018년 다시 시작된 전쟁에서는 강감찬을 중심으로 거란군을 물리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결국 11세기 고려 현종의 시대는 전쟁과 재건이 함께 이루어진 시기였습니다. 1010년의 위기를 겪은 고려는 그대로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국가 체제를 다시 정비했습니다. 1019년 귀주대첩은 그 과정의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강감찬의 승리로 기억되는 귀주대첩 뒤에는 전쟁을 견뎌낸 백성과 군사, 지방의 방어 체계 그리고 국가를 다시 세운 현종의 노력이 함께 있었습니다. 고려 현종의 시대를 살펴보면 한 나라가 외부의 강력한 침략을 어떻게 견뎌내는지 보여주는 장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010년에는 개경이 함락될 정도로 위태로웠지만 1019년에는 거란군을 귀주에서 크게 물리쳤습니다. 이 변화가 바로 현종 시대를 고려 역사에서 중요하게 평가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