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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왕 이야기

고려 태조 왕건과 고려 건국 | 918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냈다. 고려 건국의 결정적 순간

by 오늘도 좋은하루 2026. 9. 10.

10세기 고려 태조 왕건과 고려 건국은 후삼국의 혼란을 끝내고 새로운 왕조가 등장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왕건은 궁예의 부하에서 새로운 나라의 왕이 되었고 이후 신라와 후백제를 차례로 포용하면서 고려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과 고려 건국 ❘ 918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냈다. 고려 건국의 결정적 순간
고려 태조 왕건과 고려 건국 ❘ 918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냈다. 고려 건국의 결정적 순간

 

후삼국 시대를 헤쳐 나온 왕건

왕건이 고려를 세우기 전 한반도는 하나의 나라로 안정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통일신라가 오랫동안 한반도의 중심 국가로 자리하고 있었지만 8세기 후반부터 왕실과 귀족 사이의 갈등이 심해지고 지방 세력의 힘이 강해지면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점차 약해졌습니다. 각 지역에서는 독자적인 세력을 가진 호족들이 등장했고 중앙에서 임명한 관리보다 지역을 실제로 움직이는 호족의 영향력이 더 커지는 곳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9세기 후반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습니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과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였습니다. 견훤은 900년 완산주를 중심으로 후백제를 건국했고 궁예는 901년 후고구려를 세웠습니다. 이후 한반도는 신라와 후백제, 후고구려가 경쟁하는 후삼국 시대에 들어가게 됩니다. 왕건은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태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왕건의 출생 연도는 877년으로 알려져 있으며 송악 지역의 유력한 호족 세력 출신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왕륭이었고 왕륭 역시 송악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유력한 지방 세력이었습니다. 왕건은 태어날 때부터 중앙 왕실의 귀족이었던 것이 아니라 지방에서 성장한 호족 세력의 기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출신 배경은 훗날 왕건이 고려를 세우는 과정에서 중요한 힘이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중앙정부의 힘이 약해진 대신 각 지역의 호족들이 상당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혼자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했고 여러 지역의 호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왕건은 918년 고려를 건국하기 전까지 궁예 밑에서 활동했습니다.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운 이후 왕건의 아버지 왕륭 역시 궁예에게 협력했고 왕건도 자연스럽게 궁예의 세력에 합류했습니다. 왕건은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보여주면서 궁예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특히 왕건은 수군을 활용한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서해안 지역은 중국과 교역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였고 바닷길을 장악하면 군사적인 이동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이익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왕건은 수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해안 지역을 공격하면서 자신의 군사적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왕건의 세력이 커지면서 궁예의 신임도 높아졌습니다. 궁예는 왕건을 중요한 장수로 활용했고 왕건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자신의 이름을 알렸습니다. 특히 903년부터 911년 사이 왕건이 서남해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후백제와 경쟁하던 과정은 훗날 고려가 후삼국 통일을 추진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궁예의 정치가 점차 강압적으로 변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궁예는 처음에는 자신을 고구려를 계승한 지도자로 내세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적 의심이 심해졌습니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처벌했고 심지어 측근과 신하들까지 의심했습니다. 자신의 아내와 아들까지 죽였다는 기록이 전해질 정도로 통치 방식이 극단적으로 변했습니다. 궁예의 독단적인 정치가 계속되면서 궁예를 따르던 세력 가운데에서도 불만이 커졌습니다.

 

왕건 역시 이러한 분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결국 918년 궁예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고 왕건은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되었습니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은 단순한 권력 교체가 아니었습니다. 궁예가 자신의 권위를 지나치게 앞세우면서 호족들의 지지를 잃어가던 상황에서 왕건은 비교적 온건한 방식으로 여러 세력을 끌어안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918년 왕건은 고려를 세웠습니다. 국호는 고려였습니다. 고려라는 이름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왕건은 고구려의 계승자를 자처하면서 북방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할 명분도 마련했습니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했던 문제는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지방 세력들을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였습니다. 당시 전국의 호족들은 각자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왕건이 중앙에서 명령한다고 해서 곧바로 모든 지역이 움직이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왕건은 이 문제를 혼인과 포섭이라는 방법으로 해결했습니다. 여러 호족 세력과 혼인 관계를 맺고 귀순해 오는 세력에게 관직과 토지를 주면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또한 지방 호족들의 기존 기반을 일정 부분 인정하면서 고려 왕실과 연결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힘으로 모든 호족을 굴복시키려 했다면 오히려 강한 저항을 불러올 수 있었습니다. 왕건은 자신에게 협력하는 세력에게 충분한 보상을 제공하면서 점차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넓혀갔습니다. 고려라는 새로운 나라는 이렇게 후삼국의 한가운데에서 출발했습니다. 남쪽에는 후백제가 있었고 동쪽에는 신라가 있었습니다. 북쪽으로는 옛 고구려 지역을 둘러싼 여러 세력이 존재했습니다. 왕건은 단순히 나라를 세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 복잡한 세력 관계를 정리해야 했습니다.

 

후백제와의 경쟁 속에서 고려를 키운 왕건

고려를 세운 왕건에게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후백제의 견훤이었습니다. 견훤은 900년 후백제를 세운 뒤 전라도와 충청도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후백제는 군사력도 강했고 신라를 적극적으로 공격하면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습니다. 왕건이 고려를 세운 918년 이후 한반도의 정세는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고려와 후백제는 여러 지역에서 충돌했고 신라는 두 나라 사이에서 점점 더 어려운 상황에 놓였습니다. 왕건은 후백제와의 경쟁에서 군사적인 힘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신라와의 관계를 안정시키고 후백제의 공격을 받은 지역을 보호하면서 자신의 이미지를 높였습니다. 특히 왕건은 신라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후백제의 견훤은 신라를 강하게 압박했습니다. 927년에는 후백제군이 신라의 수도 경주를 공격했습니다. 견훤은 경주에 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왕위에 올렸습니다. 이 사건은 신라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당시 왕건은 신라를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공산 전투에서 후백제군에게 크게 패배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왕건을 지키던 신숭겸을 비롯한 장수들이 희생되었고 왕건 역시 위험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공산 전투의 패배는 고려에게 매우 큰 타격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후백제의 군사력이 상당히 강했으며 왕건이 후삼국 경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왕건은 패배 이후에도 후백제와의 경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지지하는 호족들을 더욱 단단하게 묶고 군사력을 다시 정비했습니다. 후백제 내부의 상황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도 왕건에게 중요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견훤은 후백제를 강력한 국가로 성장시켰지만 왕위 계승 문제에서 큰 갈등을 겪었습니다. 견훤은 자신의 넷째 아들 금강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지만 장남 신검과 다른 아들들이 이에 반발했습니다. 결국 935년 견훤은 아들들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견훤은 결국 탈출하여 고려로 망명했습니다. 왕건은 견훤을 받아들였습니다. 자신과 오랫동안 싸웠던 후백제의 건국자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왕건은 견훤을 단순한 적국의 포로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우하면서 자신의 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후백제 내부에서 벌어진 왕위 계승 갈등은 고려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되었습니다. 신라와의 관계에서도 왕건의 정책은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신라는 점점 후백제의 압박을 견디기 어려워졌고 결국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했습니다. 신라가 스스로 고려에 나라를 넘긴 것은 왕건의 통일 정책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왕건은 신라를 정복하는 방식 대신 신라 왕실을 존중하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경순왕을 예우했고 왕족과 귀족들에게도 일정한 지위를 보장했습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에 귀순하면서 왕건은 큰 군사적 충돌 없이 신라를 자신의 세력 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이것은 왕건의 통일 정책에서 중요한 특징입니다. 왕건은 상대방의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기보다 자신에게 편입시키는 방식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신라 왕실과 호족들을 포용하면서 고려라는 새로운 국가 안으로 끌어들였던 것입니다. 물론 후백제와의 전쟁에서는 이러한 방식만으로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후백제의 신검 세력은 끝까지 고려에 저항했습니다. 936년 왕건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후백제를 공격했습니다. 고려군은 후백제군과 전투를 벌였고 결국 후백제군을 크게 물리쳤습니다. 936년 후백제의 항복으로 후삼국 통일은 사실상 완성되었습니다. 918년 고려를 세운 지 18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왕건은 단순히 새로운 왕조를 세운 왕에서 후삼국을 하나로 통합한 왕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고려를 세우고 후삼국 통일을 완성한 태조 왕건

왕건이 고려를 세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고려라는 새로운 나라를 안정시키고 서로 다른 지역 세력을 하나의 국가 안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이 더욱 중요합니다.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뒤 지방 호족을 포섭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당시 호족들은 각 지역에서 독립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협력 없이는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만들기 어려웠습니다. 왕건은 혼인 정책을 통해 여러 호족 가문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또한 귀순한 호족에게 관직을 주고 그들의 기존 세력을 일정 부분 인정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왕건에게 큰 정치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에는 한계도 있었습니다. 지나치게 많은 호족 세력이 왕실과 연결되면서 고려 초기 왕권이 항상 강했던 것은 아닙니다. 왕건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왕의 권위와 정치적 조정 능력으로 여러 세력을 묶어둘 수 있었지만 왕이 사라진 뒤에는 호족 세력 사이의 갈등이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왕건 역시 이러한 문제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호족들에게 권력을 나누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북진 정책이었습니다. 고려라는 국호 자체가 고구려 계승을 강조하고 있었고 왕건은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경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도 이러한 정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북쪽 지역에 대한 관심을 계속 유지했습니다. 고려가 단순히 신라의 후계 국가가 아니라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인식을 강화하면서 새로운 국가의 정체성을 만들어갔습니다.

 

왕건의 통일 정책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민심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후삼국 시대에는 오랜 전쟁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크게 어려워졌습니다. 같은 지역에서도 지배자가 바뀌는 일이 반복되었고 전쟁에 필요한 군량과 세금을 부담해야 했습니다. 왕건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통치를 강조하면서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려고 했습니다. 후백제와의 전쟁에서 항복한 지역에 대해서도 무조건적인 보복을 하기보다는 포용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왕건이 새로운 왕조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신라를 대하는 태도는 다른 후삼국 세력과 차이가 있었습니다. 후백제가 신라의 수도를 공격하고 경애왕을 죽였던 것과 달리 왕건은 신라 왕실을 존중했습니다. 그 결과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935년 고려에 귀순했고 비교적 평화로운 방식으로 신라가 고려에 편입되었습니다. 936년에는 후백제까지 멸망하면서 후삼국 시대가 끝났습니다. 하지만 왕건에게는 통일 이후의 과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오랜 전쟁으로 분열된 지역을 하나로 묶고 서로 다른 세력들을 고려라는 국가 안에서 통합해야 했습니다.

 

왕건은 통일 이후에도 호족을 포섭하는 정책을 이어갔습니다. 또한 중앙의 관료 체제를 정비하고 지방에 대한 통치 기반을 마련하면서 왕조의 틀을 만들어갔습니다. 고려의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는 이후 여러 왕을 거치면서 점차 발전하게 됩니다. 왕건의 통일은 단순히 영토를 하나로 합친 사건이라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후삼국 시대에는 각 지역마다 독자적인 정치 세력이 존재했고 백성들도 여러 세력의 지배를 경험했습니다. 왕건은 이러한 분열된 상황을 하나의 왕조 아래 묶어 고려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특히 왕건의 통일 과정은 무력 정복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후백제와의 전쟁에서는 군사력이 필요했지만 신라에 대해서는 포용 정책을 사용했고 후백제 내부의 갈등을 활용했으며 귀순한 호족들에게 새로운 지위를 제공했습니다. 이러한 정책 덕분에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 비교적 빠르게 새로운 국가 체제를 만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고려 초기에는 호족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왕권이 완전히 안정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후 광종과 성종 등을 거치면서

 

고려의 중앙집권 체제가 더욱 발전하게 됩니다. 왕건은 943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려를 건국한 지 25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했고 새로운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왕건의 업적을 이야기할 때 918년 고려 건국과 936년 후삼국 통일은 반드시 함께 살펴봐야 합니다. 고려를 세운 것만으로는 왕건의 역사적 역할을 모두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918년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했습니다. 927년 공산 전투에서는 후백제에게 크게 패배했지만 다시 세력을 정비했습니다. 935년에는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에 귀순했고 같은 해 견훤도 고려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936년 후백제까지 멸망시키면서 후삼국 통일을 완성했습니다. 이 과정은 약 18년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왕건은 전쟁과 외교, 혼인과 포용을 함께 활용하면서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을 하나씩 바꾸어 나갔습니다. 그래서 10세기 고려 태조 왕건과 고려 건국이라는 주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왕건이 단순히 궁예를 몰아내고 왕이 된 사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는 지방 호족 중심의 후삼국 사회에서 새로운 국가의 질서를 만들어낸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고려라는 이름을 통해 고구려 계승 의식을 내세웠고 북진 정책을 추진하면서 고려의 국가적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신라 왕실을 포용하고 후백제의 내부 갈등을 이용하면서 무력과 외교를 적절하게 결합했습니다. 결국 왕건의 고려 건국은 후삼국 시대의 또 다른 세력이 등장한 사건이었고 936년의 후삼국 통일은 그 새로운 세력이 한반도의 중심 국가로 자리 잡는 과정이었습니다. 10세기의 고려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신라의 뒤를 이어 새로운 왕조가 등장했고 후백제와의 오랜 경쟁을 끝내면서 고려라는 이름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펼쳐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