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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왕 이야기

6세기 신라 법흥왕과 중앙집권 국가 | 신라의 운명이 바뀌었다. 법흥왕이 시작한 중앙집권 국가의 비밀

by 오늘도 좋은하루 2026. 9. 6.

법흥왕이 왕위에 올랐던 514년의 신라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통일신라의 모습과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신라는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주변 세력을 통합하면서 성장하고 있었지만 왕이 모든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는 국가는 아니었습니다. 왕경의 여러 세력가들이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중요한 국가의 일은 귀족 세력과 협의하면서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법흥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통치 체계를 하나씩 정비했습니다. 그래서 법흥왕의 시대는 신라 역사에서 단순히 한 왕의 업적을 살펴보는 것보다 신라라는 나라 자체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이해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6세기 신라 법흥왕과 중앙집권 국가 ❘ 신라의 운명이 바뀌었다. 법흥왕이 시작한 중앙집권 국가의 비밀
6세기 신라 법흥왕과 중앙집권 국가 ❘ 신라의 운명이 바뀌었다. 법흥왕이 시작한 중앙집권 국가의 비밀

 

병부와 율령을 통해 신라의 국가 체계를 바꾼 법흥왕

법흥왕이 즉위한 514년 신라는 이미 지증왕 때부터 여러 가지 개혁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지증왕은 국호를 신라로 정비하고 왕의 칭호를 사용했으며 농업과 행정 제도를 정비하면서 국가의 모습을 조금씩 바꾸어 놓았습니다. 법흥왕은 이러한 개혁을 이어받아 보다 구체적인 제도를 마련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주목할 부분이 군사 제도의 정비였습니다. 517년 법흥왕은 처음으로 병부를 설치했습니다. 병부는 군사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는 중앙 관부였습니다. 당시 신라에서 군사력은 국가의 생존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주변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있었고 가야 세력 역시 신라와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국가의 영역이 넓어질수록 군사를 동원하고 관리하는 체계가 필요했습니다.

 

병부가 설치되었다는 것은 군사에 관한 일을 단순히 여러 세력가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중앙에서 관리하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군사권을 왕이 직접 장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나라가 전쟁을 해야 할 때마다 각 지역의 세력이 독자적으로 병력을 동원한다면 왕이 국가 전체의 군사력을 통제하기 어려웠습니다. 반대로 중앙에서 군사 업무를 담당하는 관부를 두게 되면 왕을 중심으로 군사력을 조직할 수 있었습니다.

 

법흥왕이 병부를 설치한 이유도 이러한 변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신라는 이제 단순히 여러 집단이 힘을 합치는 수준에서 벗어나 국가 차원의 군사 체계를 만들어야 하는 단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520년에는 더욱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했습니다. 율령은 국가를 운영하는 법과 행정 규정의 체계를 의미합니다. 신라가 율령을 반포했다는 것은 왕의 명령이나 각 세력의 관습만으로 나라를 운영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국가가 일정한 법과 규칙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520년에는 율령과 함께 관리들의 공복도 제정했습니다. 관리가 입는 옷의 색깔을 통해 위계를 구분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옷의 색깔을 정하는 것이 단순한 규정처럼 보일 수 있지만 당시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왕을 중심으로 국가의 관리들이 일정한 서열을 갖고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국가가 공식적으로 구분하고 그에 맞는 복장을 정했다는 것은 신라의 정치 구조가 점차 조직적인 관료 체제로 발전하고 있었다는 증거였습니다. 율령은 신라의 중앙집권화를 이해하는 데 특히 중요한 제도입니다. 법이 만들어지면 국가가 백성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정할 수 있고 관리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도 규정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신분과 관등에 따른 질서를 국가 차원에서 관리할 수 있게 됩니다.

 

법흥왕 당시 반포된 율령의 구체적인 조항은 현재 모두 전해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17관등과 골품제, 관리의 복색 등에 관한 규정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중요한 것은 율령의 세부 내용보다 법이라는 기준을 통해 국가의 여러 세력을 하나의 질서 안에 넣으려 했다는 점입니다. 신라는 여러 지역 세력이 결합하면서 성장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각 세력의 전통과 이해관계가 달랐습니다. 왕이 강력한 권력을 갖기 위해서는 이러한 차이를 그대로 둔 채 힘으로 누르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법흥왕은 제도와 법을 통해 국가 전체에 공통된 질서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관등 제도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신라의 관등은 관리들의 정치적 서열을 정하는 제도였습니다. 신분에 따라 올라갈 수 있는 관등에 차이가 있었고 이는 이후 골품제와 연결되어 신라의 정치와 사회를 오랫동안 규정했습니다. 결국 법흥왕 시대의 율령은 단순한 법률 제정이 아니었습니다. 왕을 중심으로 국가를 조직하고 귀족과 지방 세력을 일정한 질서 안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이었습니다. 531년에는 상대등이 설치되었습니다. 처음 상대등에 임명된 인물은 이찬 철부였습니다. 상대등은 귀족회의를 대표하는 최고 관직으로서 이후 신라 정치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중앙집권 국가가 만들어진다고 해서 귀족의 힘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법흥왕은 왕권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귀족 세력을 국가의 공식적인 정치 질서 안으로 편입시키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상대등은 바로 이런 과정을 보여주는 제도였습니다. 왕이 모든 귀족을 직접 통제하기보다는 귀족들의 대표적인 위치에 있는 인물을 국가의 고위 관직으로 두고 정치 질서를 정비했습니다. 따라서 법흥왕 시대의 중앙집권화는 왕이 귀족을 완전히 제거한 과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왕권이 강해지는 동시에 귀족들도 국가의 제도 안에서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았습니다. 신라는 이러한 방식으로 왕과 귀족 사이의 관계를 재편했습니다. 법흥왕이 추진한 변화는 결국 신라를 보다 조직적인 국가로 만드는 과정이었습니다. 병부를 설치해 군사권을 정비하고 율령을 반포해 법과 행정의 기준을 세웠으며 공복을 통해 관료의 위계를 분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상대등을 설치하면서 왕권과 귀족 세력의 관계도 새롭게 정리했습니다. 이러한 제도들이 하나씩 만들어지면서 신라는 이전과 다른 나라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불교를 공인하고 왕권을 뒷받침할 새로운 국가 이념을 마련 법흥왕

시대의 중앙집권화를 이해할 때 정치 제도만큼 중요한 것이 불교입니다. 법흥왕은 불교를 국가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신라 사회에 새로운 정신적 질서를 만들어 가려고 했습니다.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시점은 법흥왕보다 앞선 시기였습니다. 고구려를 통해 불교가 전해졌고 민간에서도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국가가 공식적으로 불교를 인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습니다.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신라 귀족들의 반대가 있었습니다. 당시 신라 사회에서 불교는 기존의 전통적인 신앙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왕이 불교를 국가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자 일부 신하들은 이를 반대했습니다. 법흥왕은 불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단순히 종교를 바꾸는 문제가 아니라 국가를 하나로 묶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당시 신라는 여러 세력이 결합한 국가였습니다. 각 세력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믿어온 신앙과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왕권을 중심으로 나라를 통합하려면 서로 다른 세력을 연결할 수 있는 새로운 공통의 질서가 필요했습니다. 불교는 왕권을 신성하게 설명하는 데 활용될 수 있었습니다. 왕은 단순히 특정 지역의 세력가가 아니라 나라 전체를 다스리는 존재라는 인식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교 공인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527년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 공인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차돈은 법흥왕이 불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전해집니다. 이차돈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는 신라 불교사에서 매우 유명한 사건입니다. 당시 이차돈이 처형된 뒤 흰 피가 솟아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불교 공인이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이야기는 후대 기록에서 전승된 부분이 많기 때문에 모든 내용을 당시의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불교 공인의 과정을 설명하는 역사적 전승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527년을 전후하여 신라에서 불교가 국가적으로 공인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불교는 이후 신라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불교의 공인은 왕권 강화와도 연결되었습니다.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 국가가 만들어지려면 단순히 군사력과 법률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백성들에게 왜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지 설명할 수 있는 정신적인 근거도 필요했습니다. 불교는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신라 왕실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했고 이후 진흥왕 시대에는 황룡사와 같은 대규모 불교 사찰과 국가적인 불교 행사가 발전했습니다. 훗날 신라가 불교 국가의 성격을 강하게 보여주게 된 것도 법흥왕 시대의 불교 공인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법흥왕 자신도 말년에 승려가 되어 법공이라는 법명을 사용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왕이 직접 불교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은 당시 불교가 단순한 개인의 신앙을 넘어 왕실과 국가의 중요한 영역으로 들어갔음을 보여줍니다.

 

불교 공인은 신라의 사회에도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사찰을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었고 중국과 고구려 등을 통해 들어온 불교 문화가 신라의 전통과 결합했습니다. 이후 신라의 미술과 건축, 사상은 불교와 떼어놓고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발전하게 됩니다. 법흥왕 시대에는 중국과의 외교도 다시 활발해졌습니다. 521년 신라는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중국 남조와의 교류를 재개했습니다. 중국과의 외교는 선진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이는 통로이기도 했습니다. 율령과 관료 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도 주변 국가와의 교류가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처럼 법흥왕은 국내에서는 율령과 관부를 정비하고 국외에서는 외교 관계를 넓혀 신라가 하나의 국가로서 움직일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갔습니다. 법흥왕 시대의 국가 체제 정비는 이후 신라의 발전 방향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신라가 훗날 삼국 가운데 하나의 강력한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군사력이 강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랜 기간 동안 왕권을 강화하고 행정 체계를 정비하며 국가의 구성원들을 하나의 질서로 묶어 나갔기 때문입니다. 법흥왕의 불교 공인은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왕을 중심으로 한 국가 체제를 만들고 사회적으로는 새로운 신앙을 국가적인 질서 안에 받아들였습니다. 기존 세력과 새로운 세력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왕권이 중심을 잡으면서 국가의 방향을 제시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법흥왕의 업적을 이야기할 때 율령 반포와 불교 공인을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없습니다. 두 가지 모두 왕을 중심으로 신라 사회를 하나의 국가 질서 안에 묶는 과정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법흥왕이 추진한 중앙집권화는 이후 진흥왕 시대에 더욱 강력하게 발전합니다. 진흥왕은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화랑도를 국가 발전과 연결하며 신라의 세력을 크게 확장했습니다. 그런데 진흥왕의 이러한 발전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법흥왕 시대에 만들어진 국가 체제가 있었습니다. 법과 관료 조직이 정비되고 왕권이 강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라는 이후 더욱 적극적으로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금관가야를 병합하고 신라의 영역을 넓히면서 중앙집권 국가의 기반을 완성

법흥왕의 중앙집권화는 국내 제도 정비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신라가 주변 세력을 통합하고 영토를 확대하면서 국가의 규모가 커지는 과정도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중요한 사건이 금관가야의 병합입니다. 가야 지역은 신라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면서 오랫동안 중요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가야는 한 나라가 아니라 여러 세력이 존재하는 지역이었으며 그 가운데 금관가야는 낙동강 하류를 중심으로 성장한 강력한 세력이었습니다. 법흥왕은 가야 세력과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동시에 남쪽으로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522년에는 대가야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했습니다. 법흥왕은 이 요청을 받아들이고 이찬 비조부의 누이를 보내 혼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당시 신라와 가야 사이의 관계가 단순한 전쟁 관계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외교와 혼인 관계를 이용해 주변 세력과 관계를 조정하는 것도 신라의 중요한 정치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라는 점차 가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 갔습니다. 524년 법흥왕은 남쪽 변경을 직접 순행하면서 새롭게 개척한 지역을 살폈습니다. 이때 가야 왕이 법흥왕을 찾아와 만났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당시 신라가 남쪽으로 세력을 확대하면서 가야 지역에 강한 압박을 가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532년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금관국의 왕 김구해가 왕비와 세 아들을 데리고 신라에 항복했습니다. 금관가야의 왕이 나라의 재산과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들어왔고 법흥왕은 이들을 예우하면서 높은 관등을 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신라의 중앙집권화와 관련해서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신라가 금관가야를 정복했다고 해서 그 지역의 지배층을 모두 제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김구해와 그의 후손들은 신라 사회 안으로 편입되었습니다. 김구해의 후손 가운데 일부는 진골 귀족으로 편입되었고 이후 신라의 정치와 군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신라가 주변 세력을 통합하는 방식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신라는 정복한 지역의 지배층을 무조건 없애기보다는 자신들의 정치 질서 안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편입된 세력은 신라의 귀족 사회에서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금관가야 왕족의 신라 편입은 훗날 김유신으로 이어지는 가야계 세력이 신라에서 성장하는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532년 금관가야의 병합은 단순히 영토 하나가 늘어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신라가 다른 정치 세력을 흡수하고 자신의 국가 체제 안에 편입시키는 능력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법흥왕이 중앙집권 국가를 만들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영토 확대도 있었습니다. 국가가 강해지면 더 많은 인구와 토지를 확보할 수 있고 세금과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영토가 넓어지면 그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행정 체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영토 확장과 중앙집권화는 서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법흥왕은 제도를 정비하면서 동시에 신라의 영역을 넓혔습니다. 새롭게 확보한 지역을 통제하려면 중앙의 명령을 전달할 관리와 군사력이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라의 행정 체계도 점차 발전했습니다. 531년 상대등을 설치한 것도 이 시기의 변화와 연결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귀족 세력을 국가의 공식적인 정치 체계 안에 배치하면서 왕권을 중심으로 나라를 운영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법흥왕 시대의 또 하나 중요한 사건은 536년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연호는 단순히 연도를 표시하는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은 신라가 자신의 국가적 정체성과 왕권을 보다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상징이었습니다. 신라가 주변 강대국의 영향 아래에서만 움직이는 나라가 아니라 독자적인 국가로서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법흥왕 시대를 거치면서 신라의 모습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514년 법흥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신라는 아직 여러 세력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517년 병부가 설치되고 520년 율령이 반포되었습니다. 527년에는 불교가 공인되었고 531년에는 상대등이 설치되었습니다. 532년에는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었으며 536년에는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이 사건들은 서로 따로 떨어진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큰 흐름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법과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군사력을 중앙에서 관리하기 시작했고 귀족 세력을 국가의 관직 체계 안에 편입했습니다. 불교를 국가적으로 받아들여 왕권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이념을 마련했습니다. 주변 세력을 통합하면서 신라의 영토를 넓혔습니다. 결국 법흥왕은 신라를 하나의 강한 국가로 만들기 위한 기본적인 틀을 마련한 왕이었습니다. 물론 법흥왕 시대에 신라의 중앙집권 체제가 완성되었다고 단순하게 말하기에는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당시에도 귀족 세력은 강했고 왕권이 모든 정치적 권력을 독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라는 여전히 귀족회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변화의 방향이었습니다. 법흥왕 이전의 신라와 법흥왕 이후의 신라는 국가를 운영하는 방식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왕을 중심으로 법과 제도가 정비되었고 군사와 행정을 담당하는 관부가 설치되었습니다. 신분과 관등에 따른 질서가 국가적으로 관리되었으며 불교라는 새로운 이념이 왕실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반 위에서 진흥왕 시대의 신라는 더욱 크게 성장했습니다. 진흥왕은 6세기 중반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가야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하면서 신라의 영토를 크게 넓혔습니다. 그 결과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뒤지지 않는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러한 발전을 가능하게 한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법흥왕의 체제 정비였습니다. 그래서 법흥왕을 이해할 때 단순히 율령을 반포한 왕이나 금관가야를 병합한 왕으로 기억하는 것은 부족합니다. 법흥왕은 신라가 어떤 국가가 되어야 하는지 그 방향을 제시한 왕이었습니다.

 

여러 세력의 연맹체적 성격이 강했던 신라를 왕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국가로 바꾸었고 법과 제도를 통해 국가의 질서를 정비했습니다. 불교를 공인해 왕권을 뒷받침할 새로운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고 금관가야를 병합하면서 신라의 영역과 인적 기반을 넓혔습니다. 6세기 신라의 발전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증왕 시대의 개혁에서 출발해 법흥왕 시대의 제도 정비로 이어졌고 이후 진흥왕 시대의 영토 확장으로 연결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법흥왕은 중요한 중간 지점에 있었습니다. 법흥왕 시대는 신라가 작은 나라에서 강한 고대 국가로 변해 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시기입니다. 특히 520년 율령 반포는 신라의 국가 체제를 이해하는 핵심 사건입니다. 법에 따라 관리와 백성을 통제하고 국가의 질서를 정비하면서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517년 병부 설치 역시 군사권을 중앙에서 관리하기 위한 중요한 변화였습니다. 527년 불교 공인은 왕권을 중심으로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습니다.

 

그리고 532년 금관가야 병합은 신라가 주변 정치 세력을 자신의 국가 체제 안으로 흡수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결국 법흥왕의 시대는 신라라는 나라의 기초 공사가 이루어진 시기였습니다. 겉으로 보면 율령을 만들고 병부를 설치하고 불교를 공인하고 가야를 병합한 여러 사건이 이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의 방향이 보입니다. 그 방향은 왕을 중심으로 국가의 힘을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법흥왕은 그 과정을 완성한 왕이라기보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크게 진전시킨 왕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이후 진흥왕과 진평왕을 거치면서 신라의 중앙 행정 조직은 더욱 발전했고 왕권도 점차 강화되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변화들이 축적되면서 신라는 7세기 삼국통일을 추진할 수 있는 국가적 역량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면 6세기 법흥왕의 시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6세기 신라 법흥왕과 중앙집권 국가는 신라의 전성기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흥왕이 만든 제도와 정치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신라는 이후 더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더 강한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법흥왕의 가장 큰 업적은 눈에 보이는 영토를 넓힌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왕이 중심이 되고 법이 기준이 되며 군사와 행정이 국가의 통제 아래 움직이는 신라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점이 가장 큰 의미였습니다. 그 변화가 결국 신라를 고대 국가의 틀 안으로 끌어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