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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왕 이야기

5세기 고구려 장수왕과 평양 천도 | 427년 평양 천도는 우연이 아니었다 고구려 장수왕의 놀라운 전략

by 오늘도 좋은하루 2026. 9. 3.

5세기 고구려 장수왕과 평양 천도는 고구려가 만주 중심의 국가에서 한반도 중부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입니다. 427년 장수왕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겼고 이후 고구려는 남쪽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세력을 확대했습니다.

 

 

5세기 고구려 장수왕과 평양 천도 ❘ 427년 평양 천도는 우연이 아니었다 고구려 장수왕의 놀라운 전략
5세기 고구려 장수왕과 평양 천도 ❘ 427년 평양 천도는 우연이 아니었다 고구려 장수왕의 놀라운 전략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과 고구려의 변화

장수왕은 고구려 제20대 왕으로 413년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고구려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왕 가운데 한 명인 광개토대왕입니다. 광개토대왕은 391년부터 412년까지 고구려를 다스리면서 백제와 후연 그리고 북방의 여러 세력을 상대로 적극적인 정복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 결과 고구려는 이전보다 훨씬 넓은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장수왕은 이러한 고구려의 전성기를 그대로 물려받은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남긴 강력한 군사력과 넓은 세력권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고구려가 계속해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새롭게 확보한 지역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를 조정해야 했습니다. 장수왕의 통치는 바로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413년 장수왕이 왕위에 오른 이후 고구려의 정치와 외교는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광개토대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정복 전쟁을 벌이는 모습이 강했다면 장수왕은 군사력과 함께 외교와 정치적인 전략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특히 중국 북조와 남조의 여러 왕조와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고구려의 국제적인 위치를 안정시키려 했습니다. 당시 중국은 하나의 통일된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4세기 말부터 5세기에 걸쳐 중국 북부에서는 여러 국가가 등장하고 사라지는 혼란이 이어졌습니다. 북쪽에서는 선비족 계통의 국가들이 세력을 다투고 있었고 남쪽에서는 동진을 이어 유송과 같은 왕조가 등장했습니다. 고구려는 이러한 중국의 정세를 이용하면서 외교적인 선택을 이어갔습니다. 장수왕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광개토대왕 시대에 넓어진 고구려의 세력권을 안정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만주와 한반도 북부 그리고 남부 일부 지역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려면 기존 수도인 국내성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국내성은 고구려 초기부터 오랫동안 수도 역할을 해 온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현재 중국 지린성 지안 지역에 해당하는 곳으로 압록강을 끼고 있어 방어에 유리했고 만주 지역을 통치하는 데에도 적합했습니다. 고구려는 국내성을 중심으로 성장했고 광개토대왕 역시 이곳을 기반으로 강력한 군사 활동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활동 영역이 남쪽으로 넓어지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한반도 중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커졌고 백제와의 경쟁도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고구려의 새로운 정치적 중심지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자연스럽게 제기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것은 바로 이러한 변화와 연결됩니다. 427년 장수왕은 고구려의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겼습니다. 평양은 대동강 유역에 위치해 있었으며 농업 생산에 유리한 넓은 평야와 수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또한 한반도 서북부의 중심에 위치해 있어 남쪽으로 진출하기에도 유리했습니다. 평양은 이전부터 고구려에게 낯선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시대부터 평양 지역을 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평양은 고구려가 남쪽으로 세력을 확대하기 위한 전략적인 거점으로 활용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수도를 옮긴다는 것은 단순히 왕이 사는 장소를 바꾸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왕궁과 관청을 비롯해 귀족과 군사 조직 그리고 경제 활동의 중심지가 함께 이동해야 했습니다. 국가의 행정 체계 전체가 영향을 받는 큰 결정이었습니다. 따라서 장수왕의 평양 천도는 고구려가 국가 운영의 방향을 바꾸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평양은 농업 생산력 측면에서도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대동강 유역의 넓은 평야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이 될 수 있었습니다.

 

수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려면 식량과 노동력을 확보해야 했는데 평양 일대는 이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평양은 교통에서도 장점이 있었습니다. 대동강을 이용하면 주변 지역과 물자를 이동시키기 쉬웠고 서해를 통해 외부 세계와 연결할 수도 있었습니다. 고구려가 중국과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한반도 서북부를 중심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도 평양은 상당히 매력적인 위치였습니다. 장수왕의 평양 천도에는 정치적인 의미도 있었습니다. 수도가 국내성에 있을 때 고구려 왕실과 귀족 세력의 중심은 만주 지역에 가까웠습니다.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왕실의 활동 중심이 한반도 서북부로 이동했고 남쪽 지역에 대한 통치와 진출이 더욱 편리해졌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고구려의 남진 정책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고구려가 평양에 수도를 두었다는 것은 한반도 남부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커졌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장수왕은 평양 천도 이후 백제와 신라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습니다. 장수왕의 남진 정책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광개토대왕 시대부터 고구려는 한반도 남부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습니다. 400년에는 신라가 왜 세력의 공격을 받자 광개토대왕이 군대를 보내 신라를 지원했습니다. 이때 고구려군은 한반도 남부까지 진출하면서 고구려의 영향력을 크게 확대했습니다. 장수왕은 이러한 상황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군사력을 사용하는 것만으로 남쪽 지역을 장기간 지배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정치적 중심 자체를 남쪽에 가까운 평양으로 옮기면서 고구려의 통치 기반을 변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평양 천도 이후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 지역에 더욱 적극적으로 진출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475년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격한 것입니다. 장수왕은 대규모 군대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고 결국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켰습니다. 475년 한성 함락은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사건이었습니다. 백제는 한강 유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국가였지만 고구려의 공격으로 수도를 잃게 되었습니다. 백제의 개로왕은 전투 과정에서 사망했고 백제는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후 백제는 수도를 웅진으로 옮겼습니다. 오늘날의 공주 지역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백제는 한성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국가 재건에 나서야 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장수왕의 평양 천도가 단순한 수도 이전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평양 천도 이후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강화했고 결국 백제의 수도까지 공격했습니다. 장수왕은 평양 천도를 통해 고구려의 중심을 남쪽으로 이동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고구려의 정치적 영향력을 한반도 중부까지 확대했습니다. 이는 고구려가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중심으로 한 국가에서 한반도 중부까지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로 변화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427년 평양 천도가 가져온 고구려의 남진

427년 이루어진 평양 천도 이후 고구려의 역사에는 중요한 변화가 이어졌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백제와 신라를 비롯한 한반도 남부 국가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이 더욱 강해졌다는 점입니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시대부터 이미 남쪽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수왕은 이를 보다 체계적으로 확대했습니다. 평양이라는 새로운 수도를 중심으로 남쪽 지역을 바라보면서 백제와 신라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습니다. 특히 백제는 고구려의 가장 중요한 경쟁 상대였습니다. 백제는 4세기 근초고왕 시대에 크게 성장했고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강력한 국가를 만들었습니다. 근초고왕은 371년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킬 정도로 고구려에 강한 군사적 위협을 가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이러한 백제에 강력하게 반격했습니다. 392년과 396년에 백제를 공격했고 백제의 여러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400년에는 신라를 지원하기 위해 남쪽으로 군대를 보냈습니다.

 

장수왕은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남부 지역의 영향력을 이어받아 더욱 적극적으로 확대했습니다. 평양 천도는 이러한 정책을 추진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습니다. 평양에서 한강 유역까지는 국내성보다 상대적으로 가까웠습니다. 따라서 고구려가 백제에 군사적 압박을 가하기 위해 군대를 이동시키기에도 유리했습니다. 수도가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왕실과 중앙 정부가 남부 지역의 상황을 직접 관리하기가 쉬워졌습니다. 장수왕이 평양 천도를 결정한 배경에는 백제의 성장도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백제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고구려의 남하를 막고 있었습니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한강 유역을 장악하지 않고서는 한반도 중부에서 안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웠습니다. 한강 유역은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넓은 평야와 강을 이용할 수 있었고 주변 지역으로 이어지는 교통로가 발달했습니다. 또한 서해와 연결되어 있어 중국과의 교류에도 유리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가 한강 유역에 영향력을 확대한다는 것은 단순히 땅을 차지한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농업 생산력을 확보하고 교통로를 장악하며 해상 교류의 거점을 확보한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장수왕은 이러한 전략적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427년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 고구려는 남쪽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였습니다. 이 시기 고구려는 백제뿐만 아니라 신라와도 관계를 조정했습니다. 신라는 400년 광개토대왕의 도움을 받은 이후 고구려의 강한 영향력 아래 놓였습니다. 그러나 신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독자적인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신라가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도 경계해야 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 신라가 어느 한쪽과 손을 잡게 되면 남부 지역의 정치 질서가 달라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5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고구려의 남진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결국 475년 장수왕은 백제를 공격했습니다. 475년 고구려군이 한성을 공격했을 때 백제는 개로왕이 왕으로 있었습니다. 개로왕은 고구려의 공격에 대비하려 했지만 고구려의 군사력을 막아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고구려군은 한성을 포위했고 결국 한성이 함락되었습니다. 개로왕은 전투 과정에서 사망했습니다. 백제는 수도를 잃었고 왕실과 지배층은 새로운 수도를 찾아 이동해야 했습니다. 백제는 이후 웅진으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475년부터 백제의 웅진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고구려의 남진이 백제의 정치적 중심을 한강 유역에서 금강 유역으로 밀어낸 것입니다.

 

이 사건은 5세기 한반도의 세력 구도를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한반도 중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확보했습니다. 백제는 수도를 잃고 남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신라 역시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면서 독자적인 생존 전략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고구려의 세력은 한반도 중부뿐만 아니라 만주 지역에서도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장수왕은 북방 지역에 대한 영향력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고구려는 북쪽과 서쪽에서 중국의 여러 국가와 외교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남쪽으로 세력을 확대했습니다. 장수왕의 외교 정책은 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장수왕은 425년 유송에 사신을 보내는 등 중국 남조와 외교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중국 북부의 국가들과도 상황에 따라 관계를 조정했습니다. 당시 고구려에게 외교는 군사력만큼 중요했습니다. 중국의 여러 국가가 서로 경쟁하는 상황에서 고구려가 한쪽 국가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면 다른 세력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장수왕은 국제 정세를 살피면서 고구려의 독립적인 위치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외교적인 안정이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는 남쪽으로 군사력을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북방에서 대규모 전쟁이 계속된다면 남쪽으로 진출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장수왕은 외교와 군사 활동을 함께 활용하면서 고구려의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평양 천도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고구려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평양과 대동강 유역은 농업 생산에 유리했고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수도 주변에 충분한 농업 생산 기반이 있어야 왕실과 귀족 그리고 군대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평양은 서해와 가까웠습니다. 고구려가 중국과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해상 교통을 이용하기에도 유리했습니다. 국내성이 만주 지역을 통치하는 데 강점이 있었다면 평양은 한반도 서북부와 서해 그리고 남쪽 지역을 관리하는 데 더 적합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평양 천도의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수도가 국가의 지리적 중심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고구려가 어떤 방향으로 국가의 중심을 이동시키려 했는지는 수도의 위치를 통해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장수왕은 평양 천도를 통해 고구려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광개토대왕 시대가 정복 전쟁을 통해 고구려의 세력권을 넓힌 시기였다면 장수왕 시대는 넓어진 세력권을 정치와 외교 그리고 군사력으로 관리하면서 고구려의 영향력을 더욱 확대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양 천도 이후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의 패권을 장악했습니다. 특히 475년 한성 함락은 고구려의 남진 정책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남진이 항상 순조롭게 이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백제는 웅진으로 이동한 뒤 다시 국가를 정비했고 신라 역시 점차 세력을 키웠습니다. 결국 6세기에 들어서면서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의 관계는 다시 복잡하게 변화하게 됩니다.

 

장수왕 시대 고구려가 강력했던 이유

장수왕 시대의 고구려가 강력한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군사력이 강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광개토대왕 시대부터 축적된 군사력과 넓은 영토 그리고 중앙집권적인 국가 체제가 함께 작용했습니다. 고구려는 이미 4세기에 국가 체제를 크게 정비했습니다. 소수림왕 시대에는 372년 태학이 설립되었고 373년에는 율령이 반포되었습니다. 불교도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왕권과 중앙 정부의 힘을 강화하는 데 영향을 주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이러한 국가 체제를 기반으로 적극적인 정복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이 만들어 놓은 기반을 이어받았습니다. 장수왕의 가장 큰 특징은 장기간 왕위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장수왕은 413년에 즉위해 49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무려 78년 동안 고구려를 통치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한 왕이 이렇게 오랫동안 왕위를 유지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왕권이 안정되었고 국가의 정책을 장기간 추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수왕은 오랜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의 정치적 안정과 영토 확장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427년 평양 천도 역시 장수왕의 장기적인 국가 운영 전략과 연결해서 볼 수 있습니다. 수도를 옮긴 이후 고구려는 평양을 중심으로 국가의 행정과 경제 그리고 군사 활동을 재편했습니다. 평양은 이후 고구려의 중심 도시로 성장했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하는 668년까지 평양은 고구려의 중요한 수도로 기능했습니다. 이는 427년 천도가 일시적인 결정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장수왕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 중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475년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킨 사건은 그 결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장수왕은 북방과 서쪽의 상황도 계속 관리했습니다. 고구려 서쪽에는 중국의 여러 국가가 존재했고 이들과의 관계가 고구려의 안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장수왕은 필요할 때는 중국의 남조와 외교 관계를 맺었고 북조의 국가들과도 관계를 조정했습니다. 이러한 외교 정책을 통해 고구려는 중국의 혼란을 이용하면서 독립적인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은 당시 중국 왕조와의 외교 관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 왕은 중국의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고 외교 관계를 맺었습니다. 고구려가 중국의 여러 국가와 외교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서 고구려가 상당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장수왕은 이러한 국제 정세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고구려가 남쪽으로 군사력을 집중하는 동안 북쪽과 서쪽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협을 외교를 통해 조절하려 했습니다. 경제적인 기반도 중요했습니다. 고구려의 넓은 영토는 다양한 자원을 제공했습니다. 만주 지역에서는 농업과 목축을 할 수 있었고 한반도 북부와 평양 일대에서는 농업 생산력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평양 주변의 농업 생산력은 수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인구가 많은 수도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식량 공급이 필요했습니다. 대동강 유역은 이러한 조건을 갖춘 지역이었습니다. 교통 역시 고구려의 성장에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강과 육상 교통로를 이용해 군대와 물자를 이동시킬 수 있었고 평양을 중심으로 남북의 여러 지역을 연결할 수 있었습니다. 고구려가 넓은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군대가 빠르게 움직일 수 있어야 했습니다. 특히 백제와의 전쟁에서 수도와 전쟁 지역 사이의 거리가 중요했습니다.

 

평양은 국내성보다 백제의 중심 지역과 가까웠기 때문에 남진 정책을 추진하기에 유리했습니다. 장수왕의 475년 백제 공격은 이러한 전략적 장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고구려는 평양을 기반으로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해 한성까지 진격했고 백제의 수도를 함락시켰습니다. 이후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한강 유역은 백제에게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지만 고구려가 이를 장악하면서 백제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장수왕의 남진 정책은 고구려가 한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5세기 중반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뿐만 아니라 한강 유역까지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구려의 전성기도 영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장수왕이 세상을 떠난 뒤 고구려는 여전히 강력한 국가였지만 백제와 신라가 점차 성장하면서 남부 지역의 정치적 균형이 달라졌습니다. 6세기에 들어서면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이 등장하면서 한강 유역을 둘러싼 새로운 경쟁이 시작됩니다. 결국 고구려가 장악했던 한강 유역도 다시 전쟁의 중심지가 됩니다.

 

그럼에도 장수왕 시대의 평양 천도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큽니다. 평양 천도를 통해 고구려는 국가의 중심을 남쪽으로 이동시켰고 한반도 중부로 진출할 수 있는 전략적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장수왕은 49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강대국으로서 높은 위상을 유지했습니다.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으로 넓어진 고구려의 세력권은 장수왕 시대에 더욱 안정되고 확대되었습니다. 특히 427년 평양 천도와 475년 한성 함락은 장수왕 시대를 대표하는 두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국가의 중심을 바꾼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그 결과로 나타난 고구려의 남진 정책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평양 천도를 이해할 때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단순히 수도가 이동했다는 사실만 외우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 수도를 옮겼는지 그리고 천도 이후 고구려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였는지를 함께 살펴봐야 합니다. 국내성은 고구려의 오랜 중심지였고 만주 지역을 통치하기에 적합했습니다. 반면 평양은 대동강 유역에 위치해 농업 생산력이 높았고 서해와 가까웠으며 한반도 남부로 진출하기에도 유리했습니다. 따라서 평양 천도는 고구려의 국가적 중심이 변화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구려가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중심으로 성장한 국가에서 한반도 중부까지 적극적으로 진출하는 국가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평양은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장수왕의 정책은 이후 고구려 역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평양은 고구려의 수도로 오랫동안 기능했고 고구려가 한반도 중부와 남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결국 5세기 고구려 장수왕과 평양 천도는 고구려가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413년 장수왕이 즉위한 뒤 427년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고 475년에는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키면서 고구려의 남진 정책을 본격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이 고구려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면 장수왕은 그 넓어진 세력권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 국가의 중심을 평양으로 옮겼습니다. 이후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며 5세기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평양 천도는 결국 고구려 역사에서 하나의 도시가 바뀐 사건이 아니라 국가의 방향이 바뀐 사건이었습니다. 만주에서 한반도 중부로 이어지는 고구려의 새로운 역사가 평양을 중심으로 펼쳐졌다는 점에서 427년 평양 천도는 고구려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