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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전쟁 전투 이야기

16세기 조선 일본 진주성 전투 | 진주성 전투 일본군이 두 번이나 공격한 진짜 이유

by 오늘도 좋은하루 2026. 8. 13.

16세기 조선 일본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일본군의 거센 공격을 막아낸 대표적인 전투입니다. 특히 1592년의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진주대첩으로 불리며 조선군의 대표적인 승리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16세기 조선 일본 진주성 전투 ❘ 진주성 전투 일본군이 두 번이나 공격한 진짜 이유
16세기 조선 일본 진주성 전투 ❘ 진주성 전투 일본군이 두 번이나 공격한 진짜 이유

 

진주성을 둘러싼 첫 번째 전투와 김시민의 방어 

진주성 전투가 중요한 이유는 한 번의 전투만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1592년에는 김시민을 중심으로 한 조선군이 일본군을 물리쳤고, 이듬해에는 일본군이 다시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진주성을 공격했습니다. 두 전투의 결과는 달랐지만 모두 임진왜란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진주성 전투가 벌어진 배경과 전개 과정, 그리고 두 차례 전투가 조선과 일본에 어떤 의미를 남겼는지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1592년 조선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한 뒤 빠른 속도로 경상도 지역을 지나 북쪽으로 진격했습니다. 부산진성과 동래성이 차례로 무너지면서 일본군의 진격을 막아낼 수 있는 조선의 방어선은 빠르게 약화되었습니다. 이후 일본군은 한양을 점령하고 조선의 주요 지역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주성은 단순한 지방의 성곽이 아니었습니다. 진주는 경상우도 지역의 중심지였으며 남강을 끼고 있어 주변 지역으로 이동하는 군사와 물자의 흐름을 통제하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특히 일본군 입장에서는 전라도로 진출하기 위해 진주를 장악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전라도는 당시 조선의 주요 곡창 지역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이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느냐는 전쟁의 장기적인 흐름과도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일본군이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은 1592년 10월이었습니다. 당시 진주성에는 김시민을 비롯한 조선군이 방어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김시민은 진주목사로서 성 안의 군사와 주민들을 독려하며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했습니다. 조선군의 병력은 일본군에 비해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일본군은 임진왜란 초기부터 여러 전투를 경험하면서 상당한 전투력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진주성의 조선군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성벽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정비했고 일본군이 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각종 무기를 사용해 공격을 막았습니다. 성을 지키는 병사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도 방어에 참여하면서 진주성 전체가 하나의 방어 진지가 되었습니다.

 

일본군은 병력을 집중해 성을 공격했습니다. 성벽을 넘어오려고 시도했고 성문을 압박했으며 다양한 방법으로 조선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군은 성벽이라는 유리한 위치를 이용해 일본군의 움직임을 저지했습니다. 특히 조선군은 활과 화포 등을 활용해 성벽을 공격하는 일본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여기에서 김시민의 지휘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전쟁 초기 조선군은 여러 지역에서 일본군에게 연이어 패배하면서 사기가 크게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진주성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단순히 무기의 숫자가 아니라 끝까지 싸울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김시민은 성 안의 병사들을 독려하고 방어 체계를 유지하면서 일본군의 공격을 견뎌냈습니다.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보여준 저항은 일본군에게도 예상하지 못한 부담이 되었습니다. 일본군은 빠른 진격을 통해 전쟁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지만 진주성에서는 쉽게 승리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공격이 길어질수록 일본군의 피해도 늘어났고 조선군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결국 일본군은 진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1592년 10월에 벌어진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조선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후 진주대첩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게 되었습니다. 전투의 날짜는 기록에 따라 세부적인 표현에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1592년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벌어진 전투로 정리됩니다.

 

이 승리는 단순히 진주라는 한 지역을 지켜낸 사건만은 아니었습니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이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을 정면으로 막아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특히 한양까지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상황에서 조선군이 성을 지켜냈다는 사실은 군사적인 측면뿐 아니라 조선 사회 전체의 사기를 높이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제1차 진주성 전투가 끝났다고 해서 진주를 둘러싼 위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본군은 이 패배를 쉽게 잊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듬해 훨씬 더 큰 병력을 동원해 다시 진주성을 공격하게 됩니다. 그렇게 제2차 진주성 전투라는 또 다른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진주성에 다시 몰려든 일본군과 제2차 진주성 전투

1592년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에게 진주성은 반드시 다시 차지해야 할 장소가 되었습니다. 진주성을 그대로 두는 것은 일본군의 입장에서 단순한 군사적 손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선군이 진주성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일본군의 경상도와 전라도 진출에 부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진주성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진주는 경상우도의 중심지였고 남강을 끼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곳을 장악하면 주변 지역을 통제하기가 쉬워졌습니다. 반대로 조선 입장에서는 진주성을 잃을 경우 일본군이 서쪽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커지는 상황이었습니다.

 

1593년 일본군은 진주성을 다시 공격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이번에는 1차 공격 때보다 훨씬 많은 병력이 동원되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진주성에서 일본군이 패배한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진주성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 우키타 히데이에 등 일본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공격에 참여했습니다. 조선군 역시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병력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이번 전투는 처음부터 상황이 달랐습니다. 일본군은 압도적인 병력을 바탕으로 진주성을 포위했고 조선군은 성 안에서 방어전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1592년과 달리 이번에는 일본군의 공격 규모가 훨씬 컸기 때문에 조선군에게는 매우 어려운 싸움이었습니다.

 

성 안에서는 군사들만 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역 주민과 의병들도 함께 성을 지키기 위해 나섰습니다. 김천일과 최경회 등을 비롯한 인물들이 진주성 방어에 참여했고 황진과 이종인 등 여러 장수들도 전투에 나섰습니다. 진주성은 군사와 의병 그리고 백성이 함께 버티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일본군은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여러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대규모 병력으로 성을 포위하고 지속적으로 공격하면서 조선군의 방어력을 약화시키려 했습니다. 성벽을 공격하는 과정에서는 일본군과 조선군 사이에 치열한 근접전이 벌어졌습니다. 성벽 위에서는 조선군이 공격을 막아냈고 성 아래에서는 일본군이 끊임없이 성을 압박했습니다.

 

전투가 길어질수록 성 안의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식량과 무기의 부족이 문제가 되었고 부상자도 계속 늘어났습니다. 무엇보다 병력 규모에서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조선군이 성곽의 이점을 활용해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제2차 전투에서는 일본군이 훨씬 많은 병력을 투입하면서 방어 자체가 매우 어려워졌습니다. 조선군은 끝까지 성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격은 계속되었고 결국 진주성의 방어선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성 안의 군사와 주민들은 마지막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일본군에게 진주성을 내주게 되었습니다. 제2차 진주성 전투는 1593년 6월에 벌어졌으며 조선군과 주민들에게 매우 큰 희생을 남겼습니다.

 

이 과정에서 진주성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진주성 전투를 이야기할 때 논개의 이야기가 함께 언급되는 것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전투 이후 논개가 촉석루 아래 남강에서 일본군 장수를 끌어안고 함께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논개는 진주성의 비극을 상징하는 인물로 기억되었습니다.

 

다만 진주성 전투는 논개의 이야기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건은 아닙니다. 실제 전투에서는 수많은 이름 없는 군사와 주민들이 성을 지키기 위해 싸웠습니다. 기록에 남은 장수뿐만 아니라 기록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사람들의 희생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2차 진주성 전투는 결과만 놓고 보면 조선군의 패배였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를 단순한 패배라고만 평가하기에는 당시 상황이 너무나 처절했습니다.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에 맞서 조선군과 주민들이 끝까지 저항했다는 사실은 진주성 전투가 가진 또 다른 역사적 의미입니다.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하고 두 번째 전투에서 무너진 진주성

진주성 전투를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은 1592년의 제1차 전투와 1593년의 제2차 전투를 함께 살펴보는 것입니다. 같은 진주성에서 벌어진 전투였지만 두 전투의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첫 번째 전투에서는 조선군이 일본군을 물리쳤지만 두 번째 전투에서는 일본군의 압도적인 병력 앞에서 진주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이 차이는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이 얼마나 복잡하고 치열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제1차 진주성 전투의 승리는 조선에게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은 부산과 동래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했습니다. 일본군은 빠르게 북상했고 수도 한양까지 점령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진주성에서의 승리는 조선군도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김시민의 역할은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진주성을 방어하면서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했고 일본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습니다. 전쟁 초기 조선군 지휘관 가운데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을 정면으로 견뎌낸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국립진주박물관 역시 제1차 진주성 전투를 진주대첩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김시민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593년에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일본군은 전년도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진주성을 다시 공격했고 훨씬 큰 병력을 동원했습니다. 진주성을 반드시 함락시키겠다는 일본군의 의지가 강했던 만큼 전투의 규모도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조선군 역시 결코 쉽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김천일과 최경회 등 의병장들이 방어에 참여했고 여러 장수와 군사들이 성을 지키기 위해 싸웠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열세인 병력으로 대규모 일본군을 상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때 진주성 안에서 벌어진 저항은 단순한 군사 작전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임진왜란은 관군만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의병과 백성들이 직접 전쟁에 참여하면서 전국적인 저항이 이루어졌습니다. 진주성 역시 그러한 저항의 중심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진주성 전투가 남긴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전쟁의 지리적 특성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일본군에게 전라도로 진출하는 길목을 확보하는 것은 중요한 목표였습니다. 반대로 조선은 전라도 지역을 지키기 위해 진주를 방어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진주성은 단순히 성 하나를 차지하는 문제가 아니라 조선의 군량과 지역 통제권을 둘러싼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군은 1592년의 패배 이후에도 진주성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음 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다시 공격했습니다.

 

결국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조선은 큰 희생을 치렀지만, 이 전투를 통해 당시 조선 사회가 전쟁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진주성 전투의 역사적 의미는 승리와 패배를 함께 살펴볼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제1차 전투는 조선군이 일본군의 공세를 막아낸 승리였고 제2차 전투는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으로 진주성이 함락된 비극적인 전투였습니다. 두 전투를 하나로 묶어 단순히 진주성에서 조선군이 승리했다고 설명하면 실제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의 방어전과 의병 활동을 함께 볼 수 있는 사건입니다. 정규군의 지휘와 성곽 방어가 중심이 되었지만 지역 주민과 의병의 참여도 매우 컸습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국가의 군사력뿐 아니라 지역 사회 전체의 저항이 중요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오늘날 진주성은 당시 전투를 기억하는 역사적 공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진주대첩 역사공원과 진주성 일대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에서 벌어진 전투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습니다.

 

진주대첩 역사공원 역시 진주의 역사와 진주대첩을 기억하기 위한 공간으로 조성되었습니다. 결국 진주성 전투는 한 번의 승리로만 기억해야 하는 전투가 아닙니다. 1592년 김시민이 이끄는 조선군이 일본군을 물리친 진주대첩과 1593년 수많은 군사와 주민들이 희생된 제2차 진주성 전투가 함께 존재합니다. 그래서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의 영웅적인 순간과 처절한 비극을 동시에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전쟁은 항상 승리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진주성 전투를 살펴보면 승리 뒤에는 수많은 사람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고 패배한 순간에도 끝까지 싸운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진주성 전투는 단순한 조선과 일본의 전투가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전쟁을 어떻게 견디고 살아갔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기록입니다.